환생하여 황숙의 왕비가 되었다
제1화 환생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습하고 음침한 지하 감옥, 두 개의 굵은 쇠갈고리가 빠른 속도로 소가연의 견갑골을 관통하면.
"으아아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떨려오고 정신이 아득해 났다.
깊숙이 패어 들어간 왼쪽 눈과 뺨에 지렁이처럼 자리한 흉터가 그녀의 몰골을 더욱 흉측하게 만들었다. 검붉은 피가 갈고리를 따라 방울방울 흘러내리며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어찌... 어찌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 겁니까?"
소가연은 숨 막히는 고통을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하나는 그녀가 목숨까지 바쳐가며 연모해온 정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오라버니며 나머지 하나는 제일 믿고 지냈던 죽마고우였다. 그런 세 사람이 이토록 가혹한 처벌을 그녀에게 내린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천사진 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가연아, 도망치지 말았어야지. 연우는 너의 언니가 아니더냐. 어의가 말하길, 어렸을 적부터 몸이 허약한 연우가 백살까지 장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했다. 바로 백 가지 신약을 흡수하여 어떤 독에도 당하지 않는 너의 피를 연우에게 바치는 것이지. 네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연우의 신분을 훔쳐 소씨 가문에서 적녀행세를 하며 살았어도 연우는 너를 원망하지 않고 잘 대해주지 않았더냐. 혹 연우가 죽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언니가 장수할 수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언니의 건강을 위해 제가 죽어 마땅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소가연은 자신이 연모했던 남자가 낯설게 변한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진 오라버니, 저를 배반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천사진을 위해 세상의 모든 독을 직접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대가로 어떤 독에도 당하지 않는 몸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몸이 결국은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는 빌미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연모하는 사람은 네가 아니라 연우다. 마음씨 고운 연우가 슬퍼하는 네 모습을 지켜볼 수 없다 하여 억지로 너에게 그런 약조를 한 것이다."
"하지만 사진 오라버니의 정인은 제가 아닙니까?" 소가연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천사진과 혼인하기 위해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며 나중에는 두 자매가 동시에 한 남자를 섬겨야 한다는 그의 터무니 없는 요구까지 받아들였는데 결국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이처럼 비참한 말로였다.
"허나 나는 너를 연모한 적 없다! 난초국은 외눈박이를 태자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찌 괴물 같은 몰골을 해가지고 태자비를 꿈꾸는 것이냐?" 그의 말은 다시 소가연의 가슴을 찔렀다.
"이 눈은 오라비가 언니에게 주라고 해서 내어준 것 아닙니까! 흉터도 태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남긴 것입니다!" 얼음장차럼 차갑던 그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애절한 눈빛을 피했다. "가연아, 내가 너에게 못할 짓을 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내 앞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면 너를 귀비로 추봉하여 왕릉에 묻을 것을 약조하마. 그리고 나와 연우도 사후 너의 곁에 묻힐 것이니, 그때면 우리 다시 함께 할 수 있겠구나."
그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뻔뻔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 오라버니, 언니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찾아보면 많을 것입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소가연은 목숨을 바쳐 연모한 남자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살고 싶은 본능이 꿈틀거리며 공포감이 엄습했다.
천사진이 마음을 바꿀세라, 곁에서 전전긍긍하던 초천지 가 시간을 재촉했다. "태자 전하, 더 이상 지체하여서는 안 됩니다. 연우의 생명이 경각을 다투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지만, 연우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오라버니, 저도 오라버니의 누이이지 않습니까! 오라버니는 저의 눈을 언니에게 주라고 하시면서 평생 저를 지켜주겠다고 약조하셨잖아요. 어찌, 저에게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소가연은 한때 그녀를 목숨보다 더 아껴줬던 남자를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졌다.
그녀의 말에 초천지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 그녀를 쏘아봤다. "연우만 아니었으면 어디서 감히 너 따위 계집이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를 자격이나 있었겠느냐! 네가 우리 연우의 인생을 빼앗아갔으니 이제 그 빚을 모조리 갚을 때가 됐어!"
"제가 언니의 인생을 빼앗아갔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저의 죄입니까? 왜 모든 죄를 저에게 돌리시는 겁니까?" 결국 그들이 그녀에게 잘 해준 이유는 전부 소연우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남자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원이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그녀는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닝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시 그녀를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연아, 연우는 나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더냐. 너는 내게 뭘 해준 게 있느냐? 너의 몸에 연우에게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면 나도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 것이야."
세 남자의 말은 소가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그 순간 그녀는 육신과 정신이 동시에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모든 희망이 실망으로, 그리고 다시 절망으로 변했다.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은 분명... 분명...나인데!'
그녀의 삶을 환하게 비춰주는 빛이 있다면, 단연코 눈앞의 세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삶에 처음부터 빛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이 그녀에게 보여준 다정함과 연민은 모두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그녀의 언니이자 그들 삶속의 빛과 같은 존재를 위해서 말이다.
"태자 전하!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께서...아가씨께서 정신을 잃으셨습니다!" 이때, 소연우의 시녀인 령아가 다급하게 달려와 소식을 알렸다.
"가연아, 미안하다..." 곤룡포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낸 천사진은 그녀의 오른쪽 손목을 깊이 베었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미리 준비된 용기로 흘러 들어갔다.
소가연은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미 무기력해진 두 팔은 들어 올릴 힘조차 없었다.
몰리면서 생명의 끝자락을 맞이하는 느낌과 더불어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고통에 몸이 천천히 식어갔다. 남은 힘을 겨우 끌어 모아 필사적으로 애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의식도 점점 흐려져갔다...
그냥 이대로 죽는 걸까? 억울하고 분통하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으아악!'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비명을 지른 소가연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아가씨!" 그때, 그녀의 귓가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아니?" 소가연은 눈앞의 계집애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청아는 분명 곤장에 맞아 죽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바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흉측한 상처 하나 없이 여전히 깨끗하고 예쁜 손이었다.
석경 앞으로 달려간 그녀는 멀쩡한 왼쪽 눈과 흉터 한 점 없이 매끈한 얼굴을 손으로 어루쓸었다. 방금 일어난 모든 것이 마치 딴 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같았다.
하늘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급계, 열다섯 살, 시집 보낼 나이를 앞둔 3년 전의 그날로 다시 돌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소씨 가문의 적녀였다.
"아가씨! 깨어나셨습니까? 걱정했사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청아가 기쁜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와 소리를 질렀다. "노야, 부인, 연우 아가씨! 가연 아가씨께서 드디어 깨어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소연우가 바로 처소로 달려 들어와 그녀를 품에 꼭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가연아, 미안하다. 모두 너를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이 언니의 잘못이야. 미리 알았더라면 모든 힘을 다해 막았을 것이야.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를 볼 체면이 없었을 거야. 산에서 떨어진 사람이 나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제2화 복수의 서막
분명 산에서 떨어져 몸을 다친 사람은 소가연인데 소연우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죽다 살아난 사람이 그녀인 줄로 착각할 정도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은 마치 빗방울을 머금은 배꽃과 같아 소씨 노부부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바로 그녀의 곁에 다가와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연우야,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너와 가연이 둘 다 소씨 가문의 귀한 자식이야. 너희 둘 중 누가 다치든 이 아비의 마음이 아픈 건 똑같단다." 소전은 양녀인 소연우를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소씨 부인이 소가연을 다그쳤다. "가연아, 평소 네가 천방지축인 줄은 익히 알고 있다만, 어찌 건강도 좋지 않은 연우를 높은 산에 끌고 갈 생각을 다 했느냐? 다행히 산에서 떨어진 사람이 너였기에 망정이지. 연우가 그 높은 산에서 떨어졌으면... 어휴,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구나."
차가운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소가연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지난 생의 이 시점에서 소연우는 울다가 실신했고, 의원과 모든 하인들 심지어 부모님까지 전부 우르르 소연우의 처소로 몰려갔다. 부상입은 그녀를 혼자 뎅그러니 처소에 남겨둔 채 말이다.
두 번 다시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자신의 팔뚝을 세게 꼬집어 억지눈물을 짜냈다.
"어머니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언니를 높은 산으로 데려간 건 소녀의 잘못입니다. 길상초가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간 것입니다. 길상초가 그 산에서만 자란다고 하였고, 저는 어머니의 병이 빨리 낫길 바랐습니다. 모두 소녀의 잘못입니다.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는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소녀 혼자 산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흐느끼면서 말을 마친 소가연은 소맷자락에서 길상초를 꺼내어 팔에 난 상처를 가렸다.
전생에 그녀는 울다 기절한 소연우가 안쓰러워 길상초를 캐온 공로를 소연우에게 넘겼었다. 그 결과, 소씨 부부는 길상초를 캐온 사람이 소연우라 확신하고 양녀인 그녀를 더욱 애정했다.
한편, 그녀의 말을 들은 소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연아, 길상초가 어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건 어찌 알았느냐?"
소가연은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면서 대답했다. "근래 몇 년 동안, 소녀 약학서에만 집중했습니다. 길상초의 효능도 약학서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래 몇 년 동안 네가 약학서에만 집중한 것이 모두 네 어미의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었단 말이냐?" 소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그녀가 놀음에만 탐하고, 여홍자수나 바느질 따위 여자들이 익혀야 할 재주을 배우기 싫어 약학서를 읽는다고 생각했지, 이런 이유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소가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그녀는 언변 능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게다가 얼굴만 보아도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소연우의 거짓말에 속아 모든 일을 숨기려고만 애를 썼다. 다시 태어난 후 그녀는 드디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았다.
과연 그녀의 예상대로 소씨 부인의 눈에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이고 가연아, 바보 같이 왜 그랬느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냐? 이 어미의 병은 이미 고질이 돼서 여태껏 많은 약을 먹었어도 효과가 없었단다. 그렇게 높은 산에 올라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랬느냐. 아프지 않으냐?"
소가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소녀 아프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그런 말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거라! 이미 너를 한번 잃어본 이 어미는 두 번 다시 잃고 싶지 않구나." 그녀를 품에 안은 소씨 부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소가연이 손에 꼭 움켜쥐고 있는 길상초를 유심히 살펴본 왕의원이 깜짝 놀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어르신! 진짜 길상초가 맞사옵니다! 이제 부인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길상초는 구하기 힘들기로 이름난 약재입니다. 작은 아가씨께서 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 갸륵합니다. 제가 몇 가지 약재를 더 찾아오겠습니다. 길상초와 함께 탕약을 달이면 부인의 오랜 고질병을 반드시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의원님, 수고 많으십니다." 소가연은 남은 길상초를 모두 왕의원에게 건넸다.
소씨 부인의 각혈병은 오래된 고질이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혈흔이 섞여 나왔고, 몇 년 동안 몸에 좋다는 약을 먹었지만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길상초로 병을 완전히 낫게 해줄 수 있다는 의원의 말에 모두 기뻐했다.
소가연을 쳐다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있는 부모님을 지켜보던 소연우의 두 눈이 깊은 외로움으로 가득 찼다. 이 집안에서 자신은 항상 외톨이였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지려고 할 때, 눈치 빠른 시녀가 그녀의 몸을 잡았다. "연우 아가씨!"
시녀의 목소리에 소씨 부인이 바로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다. "연우야, 왜 그러느냐? 몸이 안 좋은 게냐?"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가연이를 더 돌보시는 것이..." 소연우는 약자를 동정하는 사람의 천성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가냘픈 몸으로 조금만 훌쩍거려도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가연이도 나의 자식이고 너도 나의 자식이지 않느냐. 두 사람 모두 이 어미의 아픈 손가락이야." 소씨 부인은 가슴이 쓰라렸다.
"어머니, 소녀가 언니의 맥을 짚어 보겠습니다." 소연우의 상투적인 수법을 잘 알고 있는 소가연은 의원 흉내를 내며 맥을 짚었다.
맥박의 울림이 크고 단단한 것이 몸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역시 그 동안 아픈 척 연기한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니는 그저 놀란 것뿐입니다. 처소에서 조금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소씨 부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연우의 손등을 다독였다.
"연우야,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너와 가연이 모두 이 어미가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자식들이야. 얼른 처소로 돌아가 쉬거라. 다음달에 너희들의 급계례성년식가 있으니 그때까지 절대 병이 나서는 안 된다."
"네. 소녀 먼저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소연우는 공손하게 손을 맞잡아 예를 올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노야! 태자 전하 드시옵니다!" 그때, 시종 한 명이 황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천사진! 태자 전하가 소씨 저택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소가연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인간쓰레기 같으니라고! 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태자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당분간 모든 증오를 속으로 씹어 삼키며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고통 없이 죽이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그녀가 겪은 고통을 똑같이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연우야, 산에서 큰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소씨 저택 마당에서 소연우와 마주친 천사진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사진 오라버니, 연우는 괜찮습니다. 가연이가..." 소연우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 꽃처럼 예쁜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괜찮다는 그녀의 말에 잔뜩 긴장했던 천사진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괜찮다고 하니 그것으로 되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소가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천사진은 그녀와 혼인을 약조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뜨거운 눈빛은 소연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녀가 다치건 죽건 그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전생에 저런 남자의 사랑을 받아 보겠다고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고 오만가지 노력을 다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사진 오라버니, 가연이를 만나러 가보십시오." 소연우가 낮은 목소리로 천사진에게 주의를 주었다.
"태자 전하께 인사 드립니다!" 소전을 위시하여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
"일어나거라." 천사진은 손을 젓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소가연의 앞에 다가왔다. 손의 상처를 대충 보고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가연아, 괜찮으냐?"
"작은 상처일 뿐입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태자 전하." 소가연은 티 나지 않게 태자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차갑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전생의 장면들이 눈앞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나무에 긁힌 작은 상처는 사지가 잘리고 쇠갈고리에 몸을 관통당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사진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평소 작은 바늘에 찔려도 아프다고 고함을 지르던 아이가 오늘은 웬 일이지? 당장이라도 내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려야 정상인데 왜 이리도 얌전한 거지? 한껏 걱정되는 얼굴로 위로를 전할 말까지 모두 준비했는데 왜 평소처럼 행동하지 않는 걸까?'
제3화 운명 같은 만남
"사진 오라버니, 저보다 언니가 더 놀라신 것 같으니 언니 곁에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가연은 소씨 부부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 피곤한 것 같으니 쉬고 싶습니다."
몸이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천사진을 한 번이라도 더 봤다간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죽일까 봐 두려운 것이 얼른 자리를 뜨려고 한 더 큰 이유였다.
"그래 가연아. 아직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았으니 얼른 들어가 쉬거라." 소씨 부인은 청아에게 소가연을 잘 모시라고 지시했다.
처소 문지방을 넘는 순간, 소가연은 자신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잡았다. 원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당장 죽일 수 없는 상황에 가슴이 옥죄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사진과 소연우가 다정하게 붙어서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번뜩였다. '그래, 서로를 마음에 품었다고 했지? 어디 알콩달콩 둘이서 잘 즐겨 보거라. 너희들이 죗값을 치러야 할 차례가 곧 올 테니.'
청아를 밖으로 내보낸 뒤 그녀는 연공을 시작했다. 자세를 잡고 내력을 끌어올리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마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아직 공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천사진을 방해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내력을 얻었었다. 내력을 얻기 위해 천기각에서 밤새도록 겪었던 고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연꽃연연꽃축제이 열리는 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다. 그날 연회에서 그녀의 삶을 망치기에 충분할 정도의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그 전까지 반드시 무공을 익혀야 했다.
그녀는 몸에 난 상처를 빨리 치료하기 위해 약을 지어오라고 청아에게 분부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해 몇 가지 약은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았다.
그날 밤.
"아가씨, 아직 몸도 성치 않으신 분이 야심한 밤에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청아는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소가연을 보며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아야, 너만 모른 척하면 된다. 잠시 밖으로 나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네가 여기서 내 옷으로 갈아입고 소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 행세를 하거라. 누가 오든 문을 열어주지 말고, 내가 이미 잠들었다고 하거라. 알겠지?" 소가연은 소씨 가문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청아뿐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꼭 몸조심하여야 합니다." 아가씨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청아는 더 만류하지 않고 소가연의 옷으로 갈아 입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가 해야 하는 것은 둘째 아가씨 행세를 잘하는 것 뿐이었다.
소가연은 몇 가지 약을 몸에 소지한 후 아무도 몰래 밖으로 나갔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기각을 찾아 나섰다.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까지 겨우 1년 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언뜰거렸다. 진한 살기가 느껴지며 바람을 타고 옅은 피 냄새가 풍겨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풀숲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 설마 저택을 나오자마자 살인을 목격하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검은 그림자들은 주위를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빠르게 그곳을 떠났다. 그녀는 바람에 풀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것을 확신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한숨을 채 쉬기도 전에 목이 갑갑해나더니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죄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기살기로 몸부림을 쳤다.
이내 귓가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움직이면 죽는다!"
남자의 말에 소가연은 몸부림치는 것을 멈추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다치셨습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남자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미천하지만 의술에 능통합니다. 나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등 뒤로 전해지는 심상치 않은 살기를 느끼며 그녀는 더 말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억!" 그때 남자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바닥에 툭 쓰러졌다.
목을 죄고 있던 남자의 손에 힘이 풀리자 소가연은 단숨에 몸을 빼서 돌아섰다.
어슴푸레한 달빛 아래 키가 크고 풍채가 빼어난 남자가 풀숲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 부위 흰옷이 피로 흥건하게 적셔져 있는 것을 보아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소가연은 자리를 뜨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남자를 이대로 뒀다가는 죽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다시 벌떡 일어나 그녀의 목을 움켜잡을 지도 몰랐다. 잠깐 고민하던 소가연은 입술을 꼭 깨물고 남자의 상처를 살피기 위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무엇을 하려는 게냐?"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눈빛이 날카롭고 살기가 가득했다.
비록 하반신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숨통쯤은 쉽게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소가연은 잘 알고 있었다.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 저의 의술로 나리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도움을 드리고자 할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소가연은 악의가 없다는 것을 다급하게 설명한 뒤 남자가 반대하지 않자 침을 꼴깍 삼키고 잡힌 손을 빼내었다.
보며 잠시 고민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남자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뱀 형태의 암기가 남자의 왼쪽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암기 주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맹독이 묻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북쪽 사막지대에만 있는 적염사라는 뱀의 독입니다. 중독되어 반시진1시간내에 해독하지 못하면 전신이 마비되어 침을 삼키는 것조차 어렵게 됩니다. 몸 안에서 확산된 독소가 오장 육부를 서서히 태워 결국 숨이 끊어지게 됩니다. 나리는 오늘 운이 좋은 겁니다. 마침 제가 해독약을 갖고 있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소가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염이라는 뱀독은 그녀에게 익숙한 독이었다. 전생에 이 독 때문에 모진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렸지만 이미 혀가 마비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이미 몸 전체가 마비되었고 몸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뜨거운 느낌이 전해졌다.
이미 몸 전체가 마비되었고 몸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은 뜨거운 느낌이 전해졌다.
남자의 얼굴에 낙담한 표정이 떠올랐다. 부주의로 작전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이렇게 처참한 말로를 맞이하다니.
소가연은 몸에 지니고 온 해독약을 꺼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챙긴 약인데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저는 나리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가면을 벗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리의 가면을 벗겼다고 제 목숨을 빼앗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강호에서는 남의 얼굴에 쓴 가면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이를 어기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예상사였다.
하지만 이 남자를 구원하려면 가면을 벗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소가연은 두려움을 무릅쓰고 미리 남자에게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말한 것이었다.
허업! 조심스럽게 남자의 가면을 벗긴 소가연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마셨다.
'세상에나,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정말 존재한단 말인가? 이렇게 빼어난 미모를 가졌으니 얼굴을 가리고 살아야 할 테지. 아니면 양반가문 규수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의원의 눈에는 남녀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나리가 저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고민하던 소가연은 면사한귀퉁이를 살짝 들어올리고 해독약을 자신의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굽혀 남 입술이 닿는 순간,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행동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를 도와 약을 모두 삼키게 한 다음 고개를 들자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남자의 눈길을 피했다.
남자의 몸에서 암기를 빼낸 그녀는 검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뭔가를 결심한 듯 해독약을 삼키고 자신의 입으로 상처에서 독이 퍼진 피를 빨아내기 시작했다.
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시간을 단축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제4화 밀회
상처에서 나온 피가 검붉은 색에서 선홍색으로 변한 것을 본 소가연은 마지막으로 빨아들인 피를 뱉어내고 입가를 닦으며 숨을 돌렸다. "휴,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남자는 천천히 손발을 움직여보았다. 소가연의 말대로 이제 독이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그가 일어나 앉으려고 하는데 소가연이 잽싸게 그의 몸 몇 곳에 은침을 찔렀다. 남자는 몸이 다시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무례를 범했습니다. 저를 죽여 입막음 하실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죽을 수 없습니다!"
소가연은 몸을 일으키고 남자의 손에 약을 쥐어 주었다. "이 약을 먹으면 몸에 남은 독을 완전히 빼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침에 묻은 약은 반시진 뒤에 효력이 없어질 겁니다. 다음에 뵙... 아니! 다시는 만나지 않길 바랍니다!"
주위를 살피다 말고 그녀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다 보니 오늘 밤에는 천기각에 갈 수 없게 되었다. 다른 날에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저택으로 걸음을 돌렸다.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본 남자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배에 힘을 주자 몸에 박혀 있던 은침들이 후두둑 빠져 나와 풀밭에 떨어졌다.
그는 바닥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다. 약간 뻣뻣한 것 외에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떠나면서 남긴 말을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만졌다. '내가 언제 죽이겠다고 했나?'
적염사는 북쪽 사막지대에 위치한 적염국에서만 생식하는 뱀이었다. 감히 비열한 수단으로 본왕에게 뱀독을 투척하다니, 겁대가리 없이 그를 건드린 놈들은 조만간 따끔한 교훈을 맛 보게 될 것이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곧 검은 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그의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주인님, 수하가 늦었습니다!" 선봉에 선 사내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주인의 옷에 새어 나온 피를 본 사내는 금세 몸을 흠칫 떨었다."주인님, 다치셨습니까?"
"괜찮다." 남자는 큰 손을 휘둘러 괜찮다는 뜻을 표하고 나서 그들을 등지고 소가연이 떠난 방향을 바라봤다. "명양아, 방금 떠난 계집의 신분을 알아내거라."
"네!" 명양이라 불린 사내는 소가연이 떠난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병마를 집결시키거라. 적염국의 팔을 잘라야겠다!" 남자는 천천히 품속에서 눈부신 빛을 뿜는 붉은색 영패를 꺼냈다. 그것은 바로 천하의 군사를 호령할 수 있다는 삼국령이었다!
방금 사라졌던 명양이 잠시 후 공손하게 남자의 뒤편에 나타났다.
"알아보았느냐?"
명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승상 댁의 둘째 낭자 소가연이라 하옵니다."
'소가연이라... 그 아이였구나!' 남자는 이름을 듣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낮은 목소리로 그 이름을 다시 되뇌었다. "곁에서 잘 주시해 보거라. 그리고 그 아이가 위험에 처하면 몰래 도와주거라."
그래, 소가연, 이것으로 해독약의 빚은 갚은 것이다.
"네!" 사내는 주인이 어떻게 어린 소녀를 마음에 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주인님, 연꽃연에 참석하시겠습니까? 왕부에 폐하의 성지가 내려왔습니다."
남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내뱉었다. "지루한 연회에 본왕이 참석할 것 같으냐? 됐다 하거라." 그때 그의 머릿속에 방금 전 소녀의 얼굴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명양에게 되물었다. "중궁전(中宫殿)에서 열리는 연회이니 성안에 있는 귀녀들은 모두 참석하겠지?"
"네."
"그렇다면 폐하께 참석하겠다고 말씀 올리거라." 남자의 입 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보아하니 어린 소녀와의 만남을 매우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네!"
다음날 아침, 소씨 부부에게 아침문안 인사를 올린 소가연과 소연우가 마당으로 나오자 한 시녀가 화분을 들고 나타났다.
딱 봐도 세간에서는 구하기 힘든 귀한 꽃 종류임을 알 수 있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독특한 꽃은 양왕 천이엽이 소연우에게 보낸 것이라고 했다.
경국지색의 미모에 뛰어난 재주까지 겸비한 소연우는 뭇사내들의 연모의 대상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연모해온 천이엽이 두 자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위로차 꽃을 보내온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소가연은 가만히 꽃을 응시했다. 전생의 그녀는 아름다운 꽃에 반한 나머지 소연우가 그녀에게 양보하겠다고 하자 냉큼 그것을 자신의 방으로 가져갔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눈길을 눈치챈 소연우가 싱긋 웃으며 손을 잡았다. "가연아, 이 꽃은 보기 드문 선자란이란다. 혹 마음에 들면 가져가도 좋다."
양왕이 보낸 귀한 꽃을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선뜻 여동생에게 양보하겠다는 소연우를 보며 시녀들은 경모의 눈빛을 보냈다. 연우 아가씨의 마음이 비단결처럼 곱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양하겠습니다. 꽃을 기르는 법도 모르는 제가 어찌 귀한 꽃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것은 양왕 전하께서 언니에게 보낸 것입니다. 꽃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언니야말로 양왕 전하의 호의를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값진 꽃을 망칠 뿐입니다."
소가연이 거듭 사양하자, 원체 꽃을 좋아하는 소연우는 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시녀인 령아를 시켜 화분을 받아오게 했다.
"저는 몸이 조금 불편한 것 같아 먼저 처소로 돌아가겠습니다." 다시 태어난 소가연은 소연우와 함께 있는 일분일초가 고역이었다.
"그래."
소연우는 소가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눈살을 찡그렸다. "령아야, 가연이가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지 않으냐?"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자꾸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 가연 아가씨는 항상 이래왔지 않습니까?" 령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가씨께서 가연 아가씨에게 뭐나 다 양보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선자란마저 가연 아가씨에게 주시겠다니요. 너무 아깝습니다."
소연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부모님께서 나를 거둬주시고 소씨 가문의 양녀로 들인 것만 해도 얼마나 큰 은혜더냐. 가연이는 소씨 가문의 적녀이니 내가 가연이에게 양보하는 것이 맞다. 우리도 얼른 처소로 돌아가자꾸나."
"네. 소인이 꽃에 물을 주고 마당 탁자 위에 두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춤 연습이 끝난 후 마당에서 감상하실 수 있게 말입니다." 령아는 화분을 손에 들고 활짝 웃었다.
"꽃에 물을 주면 안 돼!" 소연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물을 주지 말고 마당 탁자 위에 두거라." 안색이 미세하게 변한 소연우가 재차 강조하며 말했다.
소연우와 령아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은 소가연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청아에게 지시했다. "청아야, 내 처소에 찾아오는 사람이 있거든 몸이 불편하여 쉬고 있다고 전하여라."
"네. 아가씨."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시다고? 어제 밤에 몰래 밖에 나갔다 오시고, 상처도 완전히 아문 것 같던데 무슨 일이지?' 청아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아가씨가 그렇게 시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가연이 약재방에서 약재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청아가 찾아왔다. 방금 저택에 방문한 천사진이 소연우의 처소로 향했다고 했다.
드디어 미끼를 물 물고기가 왔구나!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청아야, 산책이라도 해야겠구나." 그녀의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곧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다.
처소 밖으로 나온 소가연은 소씨 부인과 마주쳤다.
"가연아, 연우가 연꽃연에서 선보일 춤이 어디까지 완성되었는지 이 어미랑 같이 구경 가지 않겠니? 너도 연우에게서 춤을 배울 좋은 기회야."
"네, 어머니." 소가연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소씨 부인을 부축했다. 좋은 구경을 혼자만 하는 것이 아까웠는데 마침 어머니를 만난 것이다.
여럿은 소연우가 거처한 부용원에 도착했다. 웬일인지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소씨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우 이 아이, 대낮에 마당 문을 잠그고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마당의 문이 열리고 방안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소씨 부인이 굳은 표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냐?"
천사진과 소연우는 사람들이 온 것도 모른 채 엉켜붙어서 서로...
이 모습을 본 소가연은는 입가에 경멸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건 복수의 시작일 뿐이야...
......
앞으로는 어떤 전개가 펼쳐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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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계속 떠서 내용 저장해둠
아무거나
환생하여 황숙의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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